정보
home
엄선 문장
home

진리따라 행동하자 우리의 벗들아 - 서울대

게시일
2022/12/26
종류
산문
1974년 10월 7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선언문
빛바랜 푸른 죄수복 사이로 스미는 밤기운이 차다. 어느덧 계절이 두번이나 바뀌어 추석날밤에는 감방에도 달빛이 파랫다. 그날은 왠지 너희들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철창을 붙들고 흔들어도 보았고, 건너편 감 방의 철창 너머로 보인 친구의 창백한 얼굴은 더욱더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했다. 그러나 강요한 침묵 속의 괴괴함은 조국의 부패를 더욱 조장시키고 마지막 남은 실날같은 자유마저 서슴지 않고 포기하는 고개 숙인 대학인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릴 뿐이다.
젊은 벗들아! 비틀거리는 조국을 돌아보자. 그리고 힘 있는 팔을 뻗쳐 맑고 뜨거운 피를 수혈할 때가 아닌가 를 생각해 보자.
3년 전 10월달. 장기집권의 타락상을 고발하던 우리 대학생들을 책가방을 빼앗은 채 교문밖으로 몰아내던 그 총부리를 기억하겠지? 길거리에 엎드린 채 통곡을 했고 군화에 짓밟힌 학교를 보며 발을 구르며 두 주먹 을 불끈 쥐기도 했었지. 머리를 깎여 군복을 입고 논산으로 쫓겨 갔던 그 친구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텅 빈 우리들 책상을 보고 4월의 최침을 더듬어 보고 있겠지.
조작된 계수경제의 허황됨은 아직도 성장이라고 외쳐대는 악다구니를 뚫고 실업자와 극심한 물가고로 허 덕이는 서민 대중의 얼굴로 번지고 있다. 한국 경제 원조를 빙자한 왜놈들의 치부가 외국 신문을 더럽혔고, 양심은 팔아먹고 정부 견제의 미명하에 부패의 지옥열차에 편승한 수십만원짜리 금뺏지 국회의원들은 인 권의 뜻조차 모르는 망발을 하고, 불쌍한 서민 대중의 피와 땀인 세금은 누구의 더러운 배를 불리고, 올해도 또 수재민은 배고파 못 살겠다 악을 써야 하는가? 페인트칠 근대화는 수재민의 누렇게 뜬 얼굴에서 제 빛을 발하고 있다. 현대조선소 노동자들의 외침과 한진 외화 편태 지출 208억원, 문화사업의 미명하에 탈세 영 리행위를 자행한 삼성문화재단의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위정자들의 대중기만과 대기업 보호정책은 노 동자들의 피나는 생존투쟁을 만들었으며 그 댓가는 그들이 차야 할 쇠고랑 밖에 없는 무법지대가 바로 이 땅이다.
동료들이여! 우리의 역사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강자에 대한 굴욕적 사대와 의존이 아니었는가? 이제금 우 리가 왜 또 그런 과오를 범하려 하는가? 자유와 민주를 위해 투쟁하다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들의 석방마저 강국 원수의 방문에 의존하려는 굴욕과 기회주의는 우리를 너무나 슬프게 한다. 양심과 정의로써 행하는 동 료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 조차도 교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대학인은 한낱 어릿광대이며, 대학의 영혼은 죽었단 말인가? 선배들의 피의 역사인 민주주의는 우리의 힘으로써 우리의 노력과 투쟁으로써 지켜야 한 다. 한 개인의 말은 법이고, 그 법에 무참히 짓밟힌 민주인사와 우리 학생들은 피맺힌 소리로 외쳐본다.
아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행동하는 것이 진리라고 외치던 대학인들아! 왜 비겁하게 고개를 숙였는가? 왜 양심을 고통을 느끼고만 있는가? 말로만 떠벌이며 아무런 행동도 못한다면 개돼지와 무엇이 다른가? 고 문과 협박과 날치기 재판, 비밀 재판에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난 이상 더이상 주저함을 버리고 무사안일을 털고 용감하자! 행동하자! 정의의 행동을 기다리는 우리 조국을 위해! 국민을 위해!
벗들아! 너희는 우리 가슴 속에 아직도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자유! 진리! 정의! 사랑!
그 칼날같이 예리한 지성의 정열은 그렇게도 쉽게 식을 수 있을까? 우리는 믿는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벗 들, 대학인들은 우리에게 푸른 가을 하늘을 볼 수 있게 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함께 얼싸안고 구국의 대열에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것을. 벗들아! 진정 자유의 종을 언제 힘껏 울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