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지방법원 2020. 5. 29. 선고 2019고합365 판결 [살인]中 - 마치며
1.
아동은 특별히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1991. 12. 20.부터 아동권리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UNCRC))의 당사국이 되었다. 아동은 출생 후 즉시 등록되어야 하며, 출생 시부터 성명권과 국적 취득권을 가지며, 가능한 한 자신의 부모를 알고 부모에 의하여 양육 받을 권리를 가진다(위 협약 제7조). 협약 당사국은 법률에 의해 인정되는 아동의 국적, 성명 및 가족관계를 포함하여 아동의 정체성을 유지할 권리를 존중하여야 하며(위 협약 제8조), 아동이 부모, 법정후견인 또는 기타 아동양육자의 양육을 받고 있 는 동안 모든 형태의 신체적·정신적 폭력, 상해, 학대, 유기, 방임적 대우, 성적 학대를 포함한 혹사나 착취 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적절한 입법적·행정적·사회적·교육적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위 협약 제19조).
위 협약의 근본정신에 기초하여 우리 아동복지법 역시, “1 아동은 자신 또는 부모의 성별, 연령, 종교, 사 회적 신분, 재산, 장애유무, 출생지역, 인종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받지 아니하고 자라나야 한다 (아동복지법 제2조 제1항). 2 아동은 완전하고 조화로운 인격발달을 위하여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행복하 게 자라나야 한다(같은 조 제2항). 3 아동에 관한 모든 활동에 있어서 아동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 어야 한다(같은 조 제3항).”고 규정하고 있다.
성별과 국적, 피부색을 떠나 모든 인간이 천부의 인권을 갖듯, 나이 어린 인간 역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권 리를 갖는다. 모든 생명은 똑같이 존귀하므로,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든 사람보다 더 보호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동을 특별히 더 보호하는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의사를 표현하고 방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생장하는 상당 기간 동안 특별한 보호 없이는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어린 인간을 대상으로 한 그 어떤 범죄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이다.
2.
살해 후 자살(murder-suicide)은 극단적 형태의 아동학대다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우리 사회에서 살해 후 자살 사건과 같은 비극이 자주 되풀이되는 공통되는 원인으 로, 자녀의 생명권이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그릇된 생각과 그에 기인한 온정적 사회 분위기가 꼽혔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이러한 범죄는 동반자살이란 명목으로 미화되거나 윤색될 수 없다는 점을 가장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유형의 범행은 동반자살이 아니다. 이 범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아이를 제 손으로 살해하는 것이다. 살해 후 자살 또는 살해에 수반된 자살에 불과하다.
동반자살이라는 워딩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과 온정주의적 시각을 걷어 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살해된 아이의 진술을 들을 수 없다. 동반자살은 가해 부모의 언어다. 아이의 언어로 말한다면 이는 피살이 다. 법의 언어로 말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살인이다. 사망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 개인에게 책임을 온전히 묻 기 어려운 정신질환자 범죄의 경우에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시각이 많음에도, 유독 부모라는 사정이 관대 한 처벌의 이유로 거론되는 인식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는 그 어떤 경우도 용납될 수 없는 중범죄다. 형사정책적으로 볼 때도 자녀 살해 후 관대한 처벌을 노린 자살 시도와의 구별도 사실상 용이하 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살해 후 자살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아동학대 범죄다. 사회구조적 요인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책임을 온전히 국가와 사회에게로만 돌릴 수 없다.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가해 부모의 범행을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발생 원인을 가해 부모의 게으름, 무능력, 나약함 등에서 비롯된 개인적 문제로만 치부해버리는 시각 역시 동의할 수 없다. 이 러한 시각은 사회가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줄어들게 할 수 있다. 살해 후 자 살 위험이 감지되거나 시도가 이뤄졌을 때 수사기관과 사법기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지원해 야 한다. 범행에 이른 경위에 개인의 문제 못지않게 사회구조적 문제가 작용하고 있음이 명백하게 드러난 이상, 가해 부모에 대한 단죄만으로 이런 범죄를 막을 수 없다. 중범죄임을 선언하고 단죄함과 동시에, 당신 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면 우리가 맡아 키우겠다고, 최소한 당신이 아이를 스스로 키울 수 있도록 우리도 최 선을 다해 돕겠다고, 자신 있게 공표하고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살해 후 자살 범행에 대한 온정주의의 기저에는, 부모 없는 아이들, 극도로 궁핍한 아이들,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앓는 아이들을 굳건하게 지지해 줄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는 불신과 자각이 깔려 있다. 과연 그러한 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대한민국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버팀목 역할도 하지 못할 만큼 형 편없는 나라였는가. 우리 사회도 그러했는가. 지금도 그러한가. 많은 노력에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막지 못 했고 계속 재발된다는 점에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피해 아동과 피고인 가족을 장 시간 치료하고 지켜본 담당의사의 탄원서 내용(... 김아동 양의 죽
음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비극일지 모릅니다. 한 부모에게, 한 가족에게만 자폐와 같은 발달장애 자녀를 책임지우는 것은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지 못 합니다 ...)을 보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장 애아동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 한 개인과 그 가족에게 얼마나 힘들고 가혹한 환경인지 절감하게 된다. 피고인 개인을 비난하면서도 중벌에 처할 수 없는 이유는, 결과에 상응한 적정한 형벌과 실제 선고되는 형 벌 사이의 차이만큼이 바로 국가와 사회의 잘못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 만큼이 우리 잘못이다. 선고되 지 않은 나머지 형이 우리가 받아야 할 비난의 몫이다.
가정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비극은 언제든 재발될 우려가 있다. 아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피눈물 흘리고 울음 삼키며 슬퍼하는 일[허난설헌 ‘곡자(哭 子)’ 중]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아동보호를 위한 제도와 사회적 안전망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정비해야 한 다. 나아가 사회안전망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위험군 가정에 꾸준히 개입하고 감시하며, 이 들을 배려하고 치료해야 한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극단적 선택의 트리거를 당기게 했는지도 면밀히 조사 해서 밝혀야 한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요인들을 찾아 없애야 한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우 리가 이런 조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최소한 가난과 장애와 타인의 불행을 조소하거나 절망 위에 또 절망을 한 짐 부리는 짓만은 그만둬야 한다. 당장 공감하고 행동할 수 없더라도 장애와 불행을 혐오하고 조롱하진 말아야 한다.
3.
마지막 호명이길 바란다
‘아리따울 ❍’와 ‘❍’ 자를 이름으로 쓰는 9살 아이가 친모에게 살해된 이 사건을 보며 당원은 참담하고 비 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한 아이의 돌이킬 수 없는 애석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피고인을 엄하게 단죄 할 수만은 없는 여러 사정을 지켜보며, 과연 무엇이 피고인에게 합당한 형벌인지, 이런 사건에서 가해의 궁 극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피해자는 과연 누구인지, 자폐와 발달장애를 가진 아동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전력을 다해 살아 왔음에도 아동이 호전되지 않고, 개인회생을 신청할 정도로 경제력이 파탄 난 상 태에서 결국 우울증으로 충동적인 범행에 이른 피고인을 구금하는 것이 맞는 지, 이 비극적 결과를 온전히 피고인과 그 가족에게만 묻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피고인의 입장에 처해 보지 않은 우리가 섣불리 피고인 을 비난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숱한 의문이 들어, 형의 정도와 피고인의 신병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그 고민의 끝에 당원은, 유리한 정상을 모두 참작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불행이 아무리 견디기 힘들더라도, 아이를 살해하는 행위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 간의 생명을 넘어설 수 있는 그 어떤 가치도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사실을 거듭 확인 하고자 한다. 아이의 생명을 앗아간 이런 참혹한 범죄를 두고 참작할만한 사정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고통 도, 그 어떤 변명의 존재도 단호하게 부정한다. 자기 자식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인 동시에 반자연적 행위다.
아이들에게 출생의 자유가 없다고 죽음마저 그러하다 말할 수 없다. 설령 가난과 장애 때문에 행복이 담보 되지 않은 삶이라도,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인생이더라도, 이들의 미래와 생명은 그 누구도 좌우 할 수 없다. 부모라도 그러하다.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 선택일지라도, 일단 태어난 아이는 한 부모의 자식에만 그칠 수 없다. 아동이는 생물학적 부모인 피고인의 아이만이 아니다. 우리가 사회적 부모 이다. 우리가 딸을 잃었다.
당원은 참담한 심정으로 애통하게 숨져간 아동이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이 이름이 아동학대로, 동반자살 이라는 명목으로 숨져간 마지막 이름이기를 또 다시 희망한다. 그것이 부질없는 기대임을 예감하지만, 그 럼에도 세상에는 끝까지 놓을 수 없는 희망이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 최소한 아이들이 어른들의 잘못 된 선택과 판단으로 쉬이 스러지지 않는 세상에 대한 희망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 이 죽어야만 그런 세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우리의 무관심과 방임을 환기시키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아이 들이 살해되어야 하는가. 아직도 숫자가 부족한가. 그렇지 않다. 세상을 일깨우기 위한 희생은 최초의 한 아 이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부족한 건 언제나 공감과 행동뿐이다.
도대체 아이들의 목숨조차 온전히 지켜주지 못하면서, 무슨 복지를 논하고, 어떤 이념을 따지며, 어떻게 정 의를 입에 올릴 수 있는가. 다시 묻는다. 우리는 과연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
4.
우리가 안전망이다
재판은 사회의 문제점을 미리 막아 내지 못 한다. 형사재판은 우물가에 서성이는 아이를 안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절차가 아니다. 아이는 이미 우물에 빠졌다. 형사재 판은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를 놓고 사후적으로 판단하는 절차다. 형사법정은 오직 한 사건, 한 개인만을 단죄할 뿐 국가와 사회를 단죄할 순 없다. 이 지점이 당원을 무력하게 만든다. 아동이의 입에 물린 거품을 보며, 분홍색 잠옷을 보며 비통해 하고 또 비통해 하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아동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참혹한 기록을 상세하게 부기하는 이유는, 우물가에 서 있는 또 다른 아동이 때문이다. 가난하고 마음이 불안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그 부모를 의지하기는커녕 두려워해야만 하는 이 끔찍한 현실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것 말고, 이제 와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인가. IMF와 금융위기를 겪으며 보았듯,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이런 범행은 급격히 증가한다. 최근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의 급속한 붕괴는 우리에게서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앗아갈까 두렵기 그지없다.
반복되는 이런 범행을 볼 때마다 당원은, ‘청테이프가, 번개탄이, 졸피뎀이, 수면유도제가, 감기약이, 찢어 진 약봉지가, 빨랫줄이, 둥글게 말아 쥔 손아귀가, 열려진 옥상 문이, 갑작스런 고급 햄 반찬이, 분에 넘친 장난감이, 예상치 못한 선물이, 계획에 없던 가족여행이, 혼자 남겨진 인형이, 발에 묻은 그을음이, 부러진 손톱이’ 두렵다. 우리의 망각과 무덤덤함이 무섭고 또 무섭다. 어떤 이의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이, 누군가에 게는 가 닿을 수 없는 이상이 되는 현실은 얼마나 서글픈가.
아이를 키우는 세상 모든 어머니가 아이에게 할 말은 응당 이러해야 한다. (...) 눈 올 때면 눈사람도 되어 보 고 / 비 올 때면 꽃잎마냥 비도 흠뻑 맞거라 / 고추잠자리 메뚜기도 따라 잡고 / 따끔따끔 쏠쐐기에 질려도 보려무나 // 푸르른 이 땅 아름다운 모든 것을 / 백지같이 깨끗한 네 마음속에 / 또렷이 소중히 새겨 넣어라 / 이 엄마 너의 심장은 낳아주었지만 / 그 속에서 한생 뜨거이 뛰여야 할 피는 / 다름 아닌 너 자신이 만들어야 한단다 // 네가 바라보는 하늘 / 네가 마음껏 뒹구는 땅이 / 네가 한생 토록 안고 살 사랑이기에 / 아들아, 엄 마는 그 어떤 재간보다도 / 사랑하는 법부터 너에게 배워주련다 (...) (렴형미, <아이를 키우며>)
아동이가 됐어야 할 눈사람도, 바라보고 뒹굴었을 하늘과 땅도, 평생 심장에 품고 살았을 사랑도, 푸른 이 땅의 아름다운 모든 것도 아동이의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엄마가 아이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 ‘약 먹 어라, 문 꼭 닫아라, 자자, 좋은 곳으로 같이 가자’가 되는 세상은, 얼마나 비통하고 또 비통한가.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할 순 있지만, 일단 뛰기 시작한 심장은 그 누구도 멈춰 세울 수 없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나를,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 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 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폴 오스터 <달의 궁전>).” 폴 오스터의 말처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타인에 대한 연 민 외에는 이처럼 극단적인 절망과 고통에 맞설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인간애로 서로 깍지 낀 두 손만이 최후이자 최선의 안전망이다. 우리가 안전망이다.